지구가 우주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어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 둘레를 달, 태양, 행성들이 각기 고유의 천구를 타고 공전한다고 하는 우주관을 말한다. 이 우주관은 16세기까지 널리 인정되었으나 그 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대체되었다. 오늘은 천동설에 대해 알아보자.
2세기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따. 지동설과 대비되는 학설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점 때문에 지구중심설이라고도 하는데,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엄밀하게 다른 개념이다. 천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모델의 번역어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어로는 지심설이라고 하는데, 반구형의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살고있다는 세계관과 천동설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사회에서 널리 공인된 세계관이었다. 기원전 4세기 정도가 돼서야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우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작하였다.
천동설은 단순한 천문학적인 계산방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당시의 철학이나 사상이 담겨있었는데, 신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둔 것은 그것이 인간이 사는 특별한 처체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임과 동시에 모든 천체의 주인이기도 하다. 모든 천체는 지구의 종이며, 주인을 따른느 형태로 운동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였던 중세 기독교 신학에 부합하였기에 천동설을 공식적인 우주관으로 간주했다.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는 태양, 달의 부등속을 설명하기 위해 공전의 중심을 지구로부터 적당히 떼어 놓은 이 심원 설을 채용했다. 또 행성의 역행과 지구 접근을 양립시키기 위해서 주원상을 전진하는 부원상에 행성을 놓고 궤적이 루프 곡선을 그리는 식의 주전원 설을 제시했다. 이러한 설에는 역학적 고찰은 전혀 없었으며 관측이 정밀해짐에 따라 구도가 기교화되었다.
십자군 원정과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콘키스타 지중해 무역 등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접촉이 활발했다. 11~13세기에 걸쳐 이슬람 과학의 성과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 등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번역이 이루어져 12세기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 문헌도 아랍어 변역을 중역한 형태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은 아구스 티누스 등 라틴교부에 의한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지구에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을 차례로 겹쳐놓았다. 튀코는 태양 주위를 수성과 금성이 회전하게 했다. 외행성의 경우에는 이심원과 주전원의 크기가 반전되었다. 지름이 커진 주전원끼리 원래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이 심원끼리 겹쳐져있었던 것처럼 겹치게 되었다. 16세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뒤에도 천동설을 위협하는 사건은 계속되었다. 신성이 관측되어 별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달보다 먼 거리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관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튀코 브라헤가 혜성을 관측하여 달보다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격렬한 논쟁을 낳았다. 대부분은 혜성을 기상현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과 행성, 별등의 모든 천체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설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했다. 행성의 시운동은 천동설로도 설명이 잘 되므로 천동설은 16 게기까지 약 1400년 동안 믿어져 왔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역행의 속도 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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